epoché ( )
Year: 2025
Type: Exhibition Curation
Participant: 김하늘, 김민영, 황은비
Design: 오도윤
Location: XXPRESS 망원
<Rolling Paper> Kinetic Installation
Statement
세계는 꽉 차 있다. 무한히 덧입혀진 의미 체계에 의해. 우리는 역사가 무겁게 퇴적된 세계를 머리에 이고 간다. 무거운 세계는 틈을 주지 않고 우리의 발걸음을 정해진 곳으로 획책하여 간다. 떠밀려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갈라지고 벌어지고 찢긴다. 과거의 어느 한 점에서 아직 이동의 채비를 마치지 못한 우리의 일부가 흐름의 속도를 미처 못 이겨 찢어지다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Epoché( )는 세계를 괄호 안에 넣음으로써 흐름에 저항하고 잠시 멈춰 서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반추, 성찰의 형태를 띄며 세계를 인간의 척도를 통해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키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벌어진 틈을 메우려는 것이다.
김하늘은 건축이라는 단단한 체계에 맞선다. 역사, 문화적 산물인 건축의 의미 체계가 내포한 폭력적 이분법을 예리하게 파고들어 폭로하고 그 질서에 균열을 내려고 시도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의 물질적 근거로서의 건축을,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해체하려고 한다. 명확한 위계를 이질적 요소의 간섭을 통해 약화시키며, 단단한 재료를 희미한 빛과 공기로 대체하고 위 아래의 관계를 전복시킨다. 해체의 과정은 파괴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숨어있는 다양한 해석의 잠재태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김민영은 내적인 평화를 찾아 자아를 세계와 화해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세계로부터 가라앉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그러나 수직강하가 아닌 완만한 가라앉음을 통해 무위의 공간으로 진입한다. 공간을 작동시키는 근원은 물과 빛이다. 물은 뭉쳐 있는 자아의 덩어리를 느슨하게 이완시킨다. 물을 통해 자아는 일종의 해리 상태에 빠진다. 빛은 밝음과 어둠이라는 태초의 질서를 상기시키며 자아의 사고 체계를 원시적인 그것으로 리셋한다.
황은비는 역사와 문화가 소거된 진공 상태에서 인간을 공간과 대면하도록 한다. 메타포가 덧씌워지지 않은 인간의 순수한 행위, 즉 서기, 걷기, 뛰기, 앉기 등이 그에 대응하는 공간을 발생시킨다. 역으로 공간의 어떤 형상은 인간의 지각에 암시를 주어 행위를 유발한다. 인간과 공간 사이에는 통제와 능동의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작동하며 행위와 형상이 증식되어간다.
The world is saturated with endlessly accumulating systems of meaning. We carry on our heads this world densely sedimented with history. The world allows no room to deviate, and compels us to follow predetermined paths. As we are swept along, we gradually fracture, split and tear. Parts of ourselves that have not yet prepared for departure cannot keep pace with the flow and are torn away.
Epoché( ) is an attempt to resist the flow and come to a momentary halt by placing the world in parentheses. It is an act of reflection and introspection, seeking to reduce the world to something measurable by the human scale. In doing so, it attempts to fill the gap and heal the cracked wounds.